직업도 함수의 묶음이었다
지난 글에서는 회사를 사람으로 만든 함수의 집합으로 봤다. 그 생각을 조금 더 밀어 보니 직업도 같은 구조로 보였다.
예전에 ‘컴퓨터’는 기계가 아니라 직업이었다.
계산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들을 computer라고 불렀다. 천문학이나 군사, 과학 분야에서 복잡한 계산을 반복해서 수행하는 역할이었다.
이후 전자식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그 직업은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라진 것은 ‘계산 결과에 대한 필요’가 아니었다.
계산이라는 함수도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그 함수를 실행하는 주체가 사람에서 기계로 바뀌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AI 시대를 바라보는 관점도 조금 달라졌다.
결과는 남고, 함수를 수행하는 주체가 바뀐다
어떤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의 작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제품 하나를 만든다고 하면, 문제를 찾고, 조사하고, 기획하고, 설계하고, 개발하고, 테스트하고, 배포하고, 운영해야 한다.
이를 함수처럼 보면 다음과 비슷하다.
문제 발견 → 조사 → 기획 → 설계 → 제작 → 검증 → 배포 → 운영
과거에는 이 함수들을 대부분 사람이 실행했다.
컴퓨터가 등장한 뒤 일부 함수가 소프트웨어로 넘어갔고, 자동화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계가 더 많은 함수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제 AI가 다시 그 경계를 움직이고 있다.
중요한 질문은 “AI가 이 직업을 없앨까?”가 아니라, “이 결과물을 만드는 함수 중 어떤 함수를 누가 담당하게 될까?”에 가까운 것 같다.
직업은 하나의 역할이 아니라 함수의 묶음이다
개발자라는 직업도 하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요구사항을 이해하고, 구조를 설계하고, 코드를 작성하고, 테스트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배포한다.
기획자나 디자이너, 마케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의 직업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여러 함수가 묶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AI가 등장했을 때 직업 전체가 사라질지 여부만 보는 것은 조금 거친 구분일 수 있다.
먼저 함수들이 분리된다.
일부는 AI가 담당하고, 일부는 사람이 계속 담당하고, 일부는 AI와 사람이 함께 수행하게 된다.
이 관점으로 보면 사람의 자리도 조금 더 명확하게 보인다.
AI가 현재 잘하는 일과 못하는 일, 안정적인 일과 불안정한 일을 함수별로 분해해 보면 사람이 개입해야 할 지점이 나타난다.
목표를 정하는 일, 애매한 상황에서 판단하는 일, 결과가 충분한지 결정하는 일, 예외를 처리하는 일, 실제 사용자 반응을 해석하는 일처럼 말이다.
물론 이것도 영원히 사람이 맡는다는 뜻은 아니다.
AI가 발전하면 다시 경계가 이동할 것이다.
LAO에서 LSOS로 넘어간 것도 함수 분해 과정이었다
예전에 LAO에서는 아이디어에서 개발 완료까지의 과정을 최대한 자동화하려고 했었다.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AI에게 맡기려 했던 셈이다.
하지만 여러 문제가 생겼다.
중간 단계가 잘못되어도 뒤에서 발견하기 어려웠고, AI의 검증이 부정확하면 문제가 그대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오랫동안 작업한 뒤 결과물을 확인했는데 기대한 수준과 전혀 다른 경우도 있었다.
결국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자동화로 묶는 방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LSOS를 만들면서 각각의 프로그램과 역할을 분리했고, 개발은 굳이 직접 자동화 시스템을 만들기보다 이미 잘 만들어진 AI 개발 도구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AI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보다 “이 함수는 누가 맡는 것이 가장 좋은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 다시 함수라는 관점으로 보니 당시의 시행착오가 더 명확하게 이해된다.
큰 함수를 작게 나누고, 각 함수마다 적합한 실행 주체와 도구를 배치한 것이다.
장인에서 산업화까지의 흐름도 다시 보인다
예전의 장인은 제품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었다.
설계하고, 재료를 고르고, 가공하고, 조립하고, 검사하고, 경우에 따라 판매까지 했다.
한 사람이 전체 함수 묶음을 가지고 있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이 함수들은 나뉘었다.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하는 것보다, 각 사람이 일부 함수에 전문화하는 것이 더 높은 생산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자동화가 진행되면서 그 함수 일부가 다시 기계로 넘어갔다.
그래서 산업의 흐름을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장인 시대에는 한 사람이 여러 함수를 실행했다.
산업화 시대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함수가 분업되었다.
자동화 시대에는 일부 함수가 기계로 이동했다.
AI 시대에는 더 많은 함수가 AI로 이동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AI 덕분에 한 사람이 다시 장인처럼 전체 결과물을 다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혼자서 전체를 할 수 있다는 것과, 혼자 하는 것이 가장 생산적이라는 것은 다르다.
규모가 커지면 다시 전문화가 유리해질 것이다.
다만 그 전문화의 단위가 기존의 개발자, 기획자, 디자이너 같은 직업명이 아니라 판단, 검증, 목표 설정, 예외 처리, 시스템 개선 같은 더 작은 함수 단위가 될 수도 있다.
앞으로 프로젝트나 프로덕트의 수가 늘어나면, 한 사람이 하나의 프로젝트 전체를 담당하는 방식도 줄어들 수 있다.
여러 프로젝트가 동시에 자동으로 돌아가고, 사람은 특정 지점에만 개입하는 구조가 자연스러워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여러 프로젝트에서 AI가 대부분의 작업을 수행하고,
한 사람은 모든 프로젝트의 최종 품질 판단만 담당하고,
다른 사람은 시장 반응 해석만 담당하고,
또 다른 사람은 예외 상황만 처리하는 식이다.
자동화된 공장에서 사람이 특정 공정이나 검사 역할을 담당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미래의 직업은 “어떤 제품을 만드는 사람인가?”보다 “결과 생성 과정에서 어떤 함수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가?”로 정의될 가능성도 있다.
다시 함수로 돌아온다
이 관점으로 산업과 직업을 보면 많은 것이 하나의 구조로 연결된다.
산업화는 함수들을 분리하고 전문화한 과정이었다.
자동화는 함수의 실행 주체를 사람에서 기계로 옮긴 과정이었다.
AI는 그 경계를 다시 크게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중요한 질문은 단순하다.
어떤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결과를 만들기 위해 어떤 함수가 필요한가?
마지막으로
그 함수는 사람이 해야 하는가, AI가 해야 하는가, 다른 도구가 해야 하는가?
직업이나 직급을 먼저 생각하기보다 이 질문부터 시작하면, AI 시대의 변화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다.
어쩌면 앞으로의 조직은 사람을 먼저 배치하고 일을 나누는 방식보다, 필요한 함수를 먼저 정의하고, 그 자리에 사람과 AI를 배치하는 방식에 가까워질지도 모르겠다.